[스크랩] (푸른 숲 제7 수필집)술은 술술 잘 넘어가고-18.포항 술마시고 경주에서
신작수필 |
18. 포항 술 마시고 경주에서
이 영백
cafe.daum.net/purnsup
나는 오늘 정말 기분이 좋았다. 월성군 G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자 말자 K교감선생님의 일갈이 “당신은 6학년 4반 담임이고, 업무는 평가입니다.”라는 이 말을 들은 지 꼭 1년이 다 되어 가면서 6학년 4반 졸업식이다. 1979년 2월 13일(火) 제32회 졸업식이다.
졸업식 전에 또 한 번 영광을 나에게 주었다. 영광이란 졸업식 사회를 나에게 맡으라는 것이다. 한사코 싫다고 하였는데도 주임교사의 또 한 번 나를 이용(?)하는 것 같았어도 어쩔 수 없이 영광의 졸업식 사회를 맡기로 하였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특히 의전(儀典)에서는 주의를 상당히 하여야 한다. 모든 절차에 따라 멘트를 만들어 두었지만 그래도 그 이루어지는 상황에 대처하는 기지가 있어야 한다. 나는 이미 두 학교를 거치면서 졸업식 사회를 맡아 본 경험도 있었다. ‘그래 하라면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주어지는 상황에서 기지를 잘 발휘하면 무난히 치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읍(邑)소재지이니 만치 그래도 교육청에서 장학사가 임석관으로 한 분이 오셨다. 그래서 시간이 되어 자연히 졸업식이 시작되었다.
“지금부터 G초등학교 제32회 졸업식을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나의 사회 멘트가 시작되면서 개식사로 진행하게 되었다. 국민의례에 들어가서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있었고, 애국가 제창에서 4절(당시 공식 행사에는 그렇게 하라는 공문 지시가 있었다.)까지 부르고, 순국선열 및 국가를 위해 돌아가신 분들의 영령을 위한 묵념도 하고, 교무주임의 학사보고가 있었다. 졸업장 수여에서 학교장이 나와서 졸업장을 읽고(이것도 사회자가 읽고 교장은 가만히 서 있다.) 대표자에게 수여 되었다. 상장 수여에서 학내 상장이 모두 수여 되었고, 대외 상장으로 교육장상 수여에 교육청 장학사가 교육장을 대신하여 수여하였다. 나머지는 지역 사회에서 수여되는 여러 가지 상장이 많이도 수여되었다. 학교장 회고사가 있었고, 교육청 장학사가 참석하였기에 축사를 하였다. 재학생 대표 5학년 학생이 송사를 낭독하였다. 드디어 6학년 졸업생 대표가 답사를 하였다. 답사가 있는 동안 여학생들의 우는 모습이 보였다. 끝으로 졸업식 노래 제창이 있어서 1절은 재학생이, 2절은 졸업생이, 3절은 전체가 부르기 시작하였다.
2절 노래가사에 따라 졸업생 여학생들이 그만 울어 제쳤다. 아니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폐식사를 선언하고, 졸업식이 끝났다. 졸업식이 끝나고, 나도 인간인데 사회를 하느라고 땀을 흘렸다. 한편으로는 얼떨떨하고 오늘은 졸업식이라 학생 지도차 급히 교실로 돌아갔다. 교실에 들어서니까 학생들 외에 이미 학부형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학부형들이 촌지 봉투를 수북이 쌓아 놓고 나를 기다렸다. 정말 지나온 1년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G초등학교이었다.
학부형들 앞에서 인사를 하였다.
“제가 지난 1년 동안 6학년 4반을 맡아서 지도하여 왔습니다. 그동안 많은 도움을 주신 우리 반 학부형 여러분들에게 진심의 감사인사를 올립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박수가 여러 군데에서 터져 나왔다. 인사를 하는 사이에 동학년 협의회가 있다고 긴급 연락이 와서 자리를 떴다. 졸업식 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정신이 없었다.
동학년 협의라는 것이 별 다른 것이 아니고, 졸업식 당일 봉투가 들어 온 것에 현금이 얼마나 들어왔느냐는 것이었다. 정말 기가 찼다. 읍 소재지에서 6학년을 담임하면 1학년담임 이상으로 수입이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상 시골 초등학교에서 6학년 담임을 두 번 해 보았지만 아무런 봉투를 받는 구경조차 못해 보았다. 읍소재지 도시에서는 이런 요상한 무엇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숙직실로 가서 금일 촌지를 확인하여 보았다.
1반 주임교사반이 150만원, 2반은 중간에 담임한 총각반이라 70만원, 3반 110만원, 내 반인 4반이 170만원이 들어 왔다.
주임교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한 반에 5만원씩 각출하여 20만원을 모아서 10만원씩 교장·교감선생님에게 봉투를 드리도록 하고, 금일에는 한 반에 20만원씩 갹출하여 포항으로 떠난다고 하였다. 나는 얼른 여부반장을 불러 145만원을 우리 집으로 보내 버렸다.
내 당시 196,000원 봉급에서 졸업식 날에 170만원이 촌지로 들어 왔으니 나도 놀라고 말았다. 촌지(寸志) 작은 뜻이라고 하였는데, 나에게 그렇게 크나큰 금액이 들어 왔다니 말이다. 바로 G초등학교의 졸업식에서 나의 작은 깨달음으로 바로 해탈(?)하였다.
당시 주임교사는 절대강자이었다. 각반에 20만원을 추렴하여 포항으로 떠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1년 동안 6학년 담임을 한 관례라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별 희한한 관례도 다 있다싶어 반감이 오기도 하였다. 당시로서는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따르고 말았다.
어둠사리가 치고 밤이 되면서 큰 도시인 포항으로 나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도 오천을 지나고, 종합제철소를 지나 형산강 검문소를 통과하였다. 포항 중심지까지 모은 돈을 내가 들고 쓰기 시작하였다. 우선 택시를 타고 좋은 술집, 아가씨들이 있는 집으로 갔다. 오늘날 같으면 구이집정도인데 당시 포항에는 한 집에 아가씨들이 보통 2∼3명이 있었다. 확실히 공업도시에는 밤이 화려하였다. 첫 술집에서는 12시가 되면 통금이 되어 더 이상 출입이 안 된다는 것이다. 시간도 벌써 11시 40분이었다.
주임선생님이 포항아가씨 둘을 데리고, 넷과 함께 경주로 가자는 것이다 당시 경주는 통금이 없는 관광지이었다. 작은 택시에 아가씨 둘과 우리 넷, 여섯 명이 어찌 탄다는 것인가? 재주도 좋지. 통금이 가까이 오면서 이제 15분이 남았다. 일단 효자 검문소를 12시 이전에 통과해야만 했다. 택시를 잡고 그 좁은 택시에 먼저 남자들이 타고 위에 아가씨 둘이 얹혀 타고, 기사와 함께 7명이 검문소를 11시 59분에 아슬아슬하게 통과하여 경주로 향하였다.
경주에 드디어 도착하였다. 12시 35분, 경주 대왕극장 앞에 내려서 함께 걸었다. 이게 웬일인가? 지나다니는데 도심이 불야성으로 관광지에 밤꽃이 피었다. 제 빨리 여관 하나를 정해서 큰 방 하나만 얻었다. 맥주와 마른안주를 들이고 그곳 아가씨 둘을 더 불러 모두 8명이 한 방에서 술 마시며, 화투 돌리고 돈도 치르고 제왕같이 술 마시고 꼴딱 밤을 새웠다.
새벽 다섯 시 반, 우리는 그만 기상하여 G도시를 향하여 첫 버스에 몸을 싣고, 포항 아가씨는 돌아갈 차비며 팁을 넉넉히 주었다. 포항에서 술 먹고, 경주에서 밤 새워 놀았다.
(푸른 숲/20100-2013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