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2집 "내 고향 뒷동산에는"-(18)집도라지
신작수필 |
18. 집도라지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아버지께서 내가 하지 말라는 공부를 하였다. 심지어 토방 문에다가 담요를 걸쳐서 불빛이 새나가지 못하도록 해 놓고 공부하여 교육대학을 가게 되었다.
가지 말라는 대학을 가기까지는 아버지와 밀고 당기기를 여럿 차례를 겪고 심지어 말다툼까지 하여야 하였다. 가장 뼈아프게 된 것은 어머니와 내 어렸을 때의 약속이 대학교에 가서 공부한다는 말이 정말 그대로 되지 못하고 막내아들이 울타리 밖에 쫓겨나가서 울고 있었으니 어머니 마음 오죽 아팠으랴. 당시는 여자로서 남편에게 나서거나 대꾸도 못하던 시절이었으니 그 속이 새카맣게 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집이 처음에는 부유하였는데 그 많은 자식들과 사촌들까지 있었으며 아버지 완벽주의로 시집·장가를 모두 보내고 나니 제일 끝에 아버지 힘없을 때 내가 마지막으로 남게 된 것이었다. 재산이 모두 분배되고 난 후이었다는 말이다. 나에게 남은 것은 논 두 마지기 400여 평이 전부이었다.
내가 대학교 진학을 못하고 있으니 심지어 큰 집 종형수가 나서서 대구 언니 집에 가정교사를 하더라도 도련님을 대학교에 보내어야 한다고 아버지에게 고하니 아버지마음이 조금 움직이었다. 일단은 내 앞으로 된 논 두 마지기를 팔아서 대학 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대학교를 가서 종형수 언니 집 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게 되었다. 나중에 나도 대구에 지리가 밝아졌고, 친구를 사귀어서 새로운 가정교사 자리를 옳게 얻게 되어서 내 공부를 마음껏 하게 되었다.
종형수가 고마워서 방학 때 꼭 내려와서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여름 방학을 맞아 종형수 집에 들렀다. 본래 집터는 돌 자갈밭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조카를 위하여 자갈을 모두 허물어 내고 그 자리에 일곱 마지기 논바닥 머리맡에 집을 지어서 힘들어 하는 종형(국가보훈대상자 2급)이 쉽게 농사지어라고 이곳에 지어드렸던 것이다. 종형도 살면서 돈을 더 벌기 위하여 기계새끼도 꼬아서 팔고, 소를 먹이기 위해 집을 달아내고 방도 넓혔다.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 쪽으로 도라지를 심어 두셨다. 종형수가 시집오면서 심어 둔 도라지가 꽃을 피웠다. 백색, 자주색 형형색색 도라지꽃이 피어 있었다.
방학을 맞아 들리니 얼마나 반갑게 맞아 주시는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종형수는 ‘우리 집안에 아무도 대학을 못 갔는데 도련님이라도 대학 가서 다니니 이렇게도 내가 더 기분이 좋다.’라고 하였다. 과연 그랬다. 나는 더욱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하여 공부하였다.
“도련님! 내가 해 드릴 것은 없고 올해 시집 온지 십오 년이면서 도라지 심어 둔 것 캐서, 붉은 상추 뜯어 비빔밥 해 드릴 테니 꼭 잡숫고 가이소”
이래 반가운 소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시집 올 때부터 심어 둔 도라지를 나를 위해 붉은 상추와 함께 비빔밥을 하시겠다니 정말 고맙고 고마울 뿐이었다. 나의 마음이 저절로 아파온다.
붉은 상추 후두∼둑 뜯고, 15년 산 도라지를 캐니 그 머리둘레만 하여도 어지간한 어린아이 머리 같이 굵었다.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도라지, 15년산 도라지를 마침내 캔 것이었다.
도라지 머리에 칼로 자르니 그만 텅 비어 있으면서도 그 속에 마침내 최고의 약인 엑기스가 있지 아니한가? 이를 모두 그릇에 부어 모아서 상추와 다듬은 백도라지를 찢고, 고추장을 넣어서 조물조물 비빔을 시작하였다. 그래 그 향내는 자그마치 십리까지 가고도 남을 듯 했다.
큰 양푼에 비빈 후 그릇마다 덜어 내어서 먹는 데 맛을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아니 정(精)만으로도 그 맛을 대신할 수가 없을 텐데 하물며 그 맛이야 물어 무엇 하랴.
이후 세월이 흘러 종백씨도 돌아가셨고, 곧 이어 종형수도 돌아가셨다. 마침 그 사시던 집은 팔지 않았다니 다행이었다. 그 집 도라지는 다시 심었는지는 나도 궁금할 뿐이다. 아마도 종형수님의 마음과 얼굴이 그 집도라지 꽃에 어울리게 해마다 잘 피고 있지 싶다.
(푸른 숲/20100-2013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