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2집 "내 고향 뒷동산에는"-(16)해당화
신작수필 |
16. 해당화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내가 태어나서 네 번째로 옮긴 곳이 바로 새보 초가이었다. 서기1956년은 아직 농촌에서 전형적으로 대다수가 어렵게 살던 시절인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해이었다.
우리 집에는 그래도 당시 오손도손하게 잘 살고 있었던, 마음에 대궐 같은 초가집이었다. 헛간이 대문 서쪽으로 길게 지어져 있어서 비가와도 웬만하면 그곳에서 여물도 썰 수가 있었고, 세 마리 개가 비도 피할 수 있었다. 아울러 헛간에는 짚을 불 때고 나서 쳐내어둔 재를 많이 모았으며, 거름, 풋나무 등 일하던 것을 그냥 둘 수도 있었던 곳이다.
사랑채에는 아버지의 휴식처, 비가 오는 날이면 으레 심청전(沈淸傳)이나 옥단춘전(玉丹春傳)으로 뒷집 기장댁 할머니도 오셔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창을 듣는다. 간혹 신이 나서 추임새도 넣는 것을 보았다. 당시는 라디오도 없어서 재료비만 들여서 광석라디오를 조립해 들었다. 그것도 버드나무 높은 곳에 올라가 안테나를 달던 시대이었다. 광석라디오는 스피커에 나오는 소리가 아주 작아서 귀를 라디오 곁에 바짝 갖다 대어야 겨우 들리는 소리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부지런 하셔서 디딜방앗간도 만들어 두셨고, 자랑거리인 소를 열한 마리나 먹여서 농촌에서 농사일꾼과 환금으로 재산 늘이는데 중요한 몫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우리 집에는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와글와글 하였다.
1957년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해에 숙형(叔兄)께서 7년간의 군장기복무를 마치면서 특무상사로 제대하여 오셨다. 그래서 더욱 사는 재미가 났다. 숙형은 당시 특수농사를 지어셨다. 담배, 땅콩, 참깨, 들깨, 콩이며 그리고 박하농사까지 벌여 두었으니 그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또 여름에는 참외, 수박농사까지 하여 우리들에게 무척 바쁘도록 일하게 만들었다.
큰 머슴, 중간 머슴, 작은 머슴, 숙형, 계형(季兄), 나까지 모두가 일꾼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셋째 누이 등 사람들이 와글거렸다. 길가 사는 집으로 과객은 보통 3∼4명씩이 자고, 밥 먹고서 우리 집에 일을 거들어 주고 가는 것이었다. 매일 매일이 잔치하는 집이었다.
아버지는 각종 나무를 구해다가 심었다. 그리고 우물을 판 후에 우물가에 해당화(海棠花)를 심었다. 해당화는 가시가 있어서 벌레가 못 들어오게 우물 둘레에다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자 그것이 도랑가를 따라 해당화가 자꾸 번져 나갔다.
해당화는 본래 바닷가의 모래땅이나 산기슭에 자라고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그런데 우리 집 우물가에는 모래가 많아서 잘 자라고 있었다. 줄기에는 커다란 가시, 가시털, 융털 등이 많이 나 있고, 가지를 많이 친다. 잎은 7∼9장의 잔잎으로 이루어진 깃털 모양이며 겹잎이다.
꽃은 5∼8월경 1개 또는 2∼3개가 붉은색으로 줄기 끝에 피는데 향기가 진하며 흰색도 있다. 수술은 매우 많다. 열매는 둥글고 붉은 황색의 수과(瘦果)로 익으며 윤기가 난다.
꽃과 열매가 적은 것을 개해당화, 꽃잎이 많은 것을 겹해당화 또는 만첩해당화, 가지에 가시가 거의 없고, 잔잎이 작고 좁으며 잎에 주름이 적은 것을 민해당화라 한다. 그런데 우리 집 해당화는 겹해당화에 속했다. 그래서 그런지 꽃잎이 많아서 아랫동네에서 보면 겹해당화에 파묻힌 집이 되고 말았다.
해당화는 우리가 윗마을에 놀다가 와도 꽃을 피워서 반갑다고 하늘거린다. 우물에 무거운 물을 퍼 담아서 무지개에 비뚤비뚤 지고 가는 나를 보고도 웃는다. 저절로 해당화만 보면 마음이 넓어졌다.
꽃이 없던 막연한 들판 가운데 우리 집을 짓고 생기게 된 우물과 함께 벌레를 예방하려고 구해다 심어 둔 겹해당화는 조화롭게 만발하여 쳐다보는 아랫동네 사람들까지 즐겁게 만들었다. 녹색 들판인 경주분지 소한들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더욱 겹해당화가 피어 어울리게 만들었다.
새보 초가집에 오래 살면서 셋째 누이도 시집가셨고, 그러는 사이에 넷째 누이도 시집가려고 하였다. 마침내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그해 섣달 그믐날 이틀 앞에 결혼하였다.
아랫동네에서는 우리 넷째 누이를 서로 며느리를 삼고자 하였다. 자연히 우리 집이 해당화가 많다고 해당화집이라고 부르고 넷째 누이가 있어서 해당화집 아가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넷째 누이는 좀처럼 시골에 시집을 가려고 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세무공무원 하는 매형(妹兄)을 중매 받아 시집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무원 하던 매형이 결혼 1주일이 지나서 사표내고 처가에 왔다.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로부터 야단법석이었다. 당시 시골에서 공무원을 사위 맞는 것이 좋은 것으로 평가하였는데 결혼 1주일 만에 사표를 내고 울산공업센터에서 소·도매장사를 한다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말 소·도매장사를 계속하여 돈을 잘 벌었다. 당시 울산공업센터가 들어서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어 일반 소·도매장사가 먹혀들어 가게 된 것이었다.
우리 집은 해당화집이라고 불리었고, 넷째 누이가 있어서 당시 해당화집아가씨로 부르게 되었다. 우리 집 해당화는 제철에 맞춰 피면서 시집간 넷째 누이 얼굴이 해당화 속에 피어 있었다.
(푸른 숲/20100-2013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