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2집 "내 고향 뒷동산에는"-(12)고디
신작수필 |
12. 고디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 남쪽에는 경주분지(慶州盆地)가 있다. 분지는 평야(平野)가 되지 못한 들판 “소한들”이다. 그래도 이 지역에서 이런 들판이 있어서 당시 쌀을 생산하고 이 고장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쌀 창고이었다.
토함산이 우람하게 동해를 에둘러 있고, 그 아래 경주분지 오른쪽에 개남산이, 왼쪽에 밀개산이 양팔을 벌려 이 소도시를 포용하고 있다. 이미 구정리(九政里)는 불국사(佛國寺)로 올라가는 입구로 관광지 냄새가 물씬 나는 소도시가 되어 있었고, 내 고향 시래리(時來里)에는 동해남부선 철로가 발전을 꼭꼭 틀어막고 있어서 당시 전기(電氣)도 들어오지 않는, 밤이면 캄캄한 오지(奧地)로 착각하는 그런 농촌이었다.
우리 집 삽살개가 크게 짖어 댄다. 누가 찾아 온 것이 분명하였다.
“누구십니까?”
“어, 네 어머니 계시느냐?”
“예. 그런데 무엇 하시려고요?”
“그래, 어머니 뵈러 왔느니라.”
그래서 막일꾼같이 생긴 두 사람이 찾아 왔는데 조금은 두려워하면서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어머니와 계형(季兄)이 함께 나오셨다.
“어찌 오셨습니까?”
“예. 우리들이 고압선(高壓線)공사를 하는데 며칠간 밥을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아울러 참도 준비가 되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런데 반찬이 시골이라 그렇고, 새참은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야 하나요?”
“예. 시골 밥과 반찬이면 됩니다. 집을 나왔기에 대신에 밥을 많이 담아 주시고요, 참에는 막걸리에 오이 안주라도 괜찮습니다. 돈은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제발 좀 맡아 주십시오.”
“사람 수가 몇이나 됩니까?”
“예. 우리 일꾼 넷과 기사 한 분 등 총5명입니다. 참, 그리고 잠을 잘 수 있는 방이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 방은 하나 드리겠습니다.”
우리 어머니 시골에 사셔도 이렇게 영업(營業)을 잘 하시다니 말이다. 그래 그날부터 아침, 점심, 저녁 세끼와 오전, 오후, 밤 등 새참까지 하여 수월찮게 시골에서 갑자기 돈벌이를 하게 되었다.
끼니 1인당 200원, 참은 술과 안주 준비로 묶어서 200원, 숙박비는 1인당 100원으로 5명에 500원씩 장장 8일간을 하였으니 제법 벌이가 되었다. 돈으로 환산하니 자그마치 (200원×3식×5명×8일)+(200원×3회×7일)+(5명×100원×7일)=31,700원이다. 1964년에 시골에서 현금으로 31,700원은 당시로서는 어머 어마한 돈이었다.
그러니 반찬 걱정, 안주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제일 먼저 나에게 어머니의 요청이 들어왔다. 바께스(bucket)를 지게에 지고 나가 고디*를 잡아오라는 것이다. 이 고디는 반찬으로도 술안주로도 적격이다.
바로 경주분지 불국사기차역 앞 들판 “소한들”논바닥에 고디가 살고 있지 아니한가? 논으로 이어진 분지 들판에서는 농병아리가 우는 소리도 들리고 간혹 뜸부기 우는 소리는 풍요로운 들판에서 들리는 놀라울 일이다.
어린 아이라도 그릇을 하나 들고 들어가서 조용하게 그저 논바닥에 누워 있는 고디를 주어 담으면 되는 것이었다. 참 쉽다. 그저 주워 담으면 되는 것이니까 반찬 만들기에 바쁘신 어머니께서 나에게 이 분들 참과 반찬용으로 고디를 많이 잡아 오라는 것이었다.
고디는 논바닥에 해충을 잡아먹는 천적인데 이 고디를 잡아 오라니 어머니께서도 너무 하셨다. 그러나 어디 이를 거절할 수가 있단 말인가? 어린 모가 자라고 있는 논바닥에 모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떼면서 정말 조심조심하여 논고랑을 누비며 고디 하나씩을 발견하면 엎드려서 줍고, 허리 펴고 그 고디는 바가지에 딸그락 소리를 내면서 떨어진다. 이렇게 하나씩 주워 모은 것이 바깥 논두렁에 둔 바께스에 가득차면 이를 지게에 지고 집으로 와야 한다. 낑낑거리면서 조양 못을 지나 도랑둑을 지나 집으로 가져 왔다.
이제 우물물을 퍼서 고디를 하나하나 모두 깨끗이 씻어서 반 바께스 가득히 갖다 드렸다. 고디도 맑은 물을 좋아해서 그만 제 껍질을 나와 달팽이처럼 춤을 추고 있다. 그래도 어머니는 고맙다는 말씀 한마디 없이 솥에다 이를 들이부어서 물 붓고 푹 삶아 버린다.
어느 순간에 고디는 다 익혀지고 말았다. 이제는 삶은 고디를 제일 윗부분에 동그란 얇은 겉 딱지를 떼어 내고 탱자나무 침으로 고디 머리를 찔러 뱅뱅 돌려서 밑 창자까지 다 빼내어야 한다. 새하얀 알미늄 그릇에 삶은 고디가 밑까지 빠져나와 한 곳에 모인다. 고디 머리는 새카맣고 끝이 딱지에 붙어 있어서 평평하다. 그리고 끝까지 딸려 나온 새파란 창자 끝까지 빼내어 놓으니 오글오글 뱅뱅 꼬인 대로 빠져 나와 있다.
어머니는 새참이 매우 급하다면서 우선 내가 모두 까놓은 고디에 고추장과된장을 적당히 섞어 붓고 조물락 조물락 묻힌다. 집에서 만든 식초를 간간이 쳐가며 맛을 본 후 막걸리 주전자와 젓가락, 포개어진 잔 5개를 함께 바지게 차린 지게에다 얹어 보낸다. 고압선설치를 하시는 아저씨들께 갖다 드리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잡아서 내가 구경하였으면 되었지. 이를 지게에 받쳐 들고 갖다드리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이내 점심 준비를 하여야 하니 나라도 도와 드려야지 어쩌나.
고압선 설치를 하시는 아저씨들에게 오전 참으로 제격인 고디 술안주를 들고 갔다.
“아저씨들 새참 잡수러 나오이소!”
“그래. 얘야. 나간다!”
막걸리를 양은 술잔에 붓고 마시면서 젓가락을 안주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날름 입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사랑한 고디를 말이다.
“아이고! 야야 이게 무엇이고? 이래 맛이 좋아?”
“고디 아잉교?”
“고디? 고디가 무엇인가?”
“우리는 논 고디라고 합니더.”
“아, 논 고둥 말이구나! 아니 이것을 어떻게 잡았지?”
“예. 논 고디는 논에 있어예. 논고랑마다 누워 있으므로 그저 주워 담으면 됩니더.”
“아하! 그래. 저기 논고랑마다에 까만 것이 조그맣게 누워 있구나. 이것 누가 잡았노?”
“예. 제가 잡았십니더.”
“아이고. 고것 술안주로는 제격이다. 옛다! 수고했다. 오십 원 줄께. 내일 또 많이 잡아라.”
“예. 고맙십니데이.”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고디가 춤추며 좋아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달랑 돈 오십 원에 눈이 멀어 고디 줍기에 여념이 없게 되고 말았다.
고향에서도 울산공단(蔚山工團)이 들어서면서 고압선이 500m마다 전신주가 줄을 잇고 있었다. 발전소가 어디에서 있어 오는 전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고장에 고압선이 줄을 이었다. 자그마치 2만2천 볼트 고압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산에도 고압선이 지나면서 보상금까지 나왔다. 요즘 같으면 고압선이 지나가면 안 된다고, 해롭다고 데모라도 하여 보상금을 더 받아내겠지만 당시는 그저 우선 시골에 보상금을 주니까 아무 말 못하고 그저 고압선이 설치되고 말았다.
우리 동네에서는 그런 줄도 모르고 논바닥에서는 당시 고디가 많이 자라고 있을 뿐이었다.
(푸른 숲/20100-201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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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디 : 경주 사투리로 “논 고둥”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