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1집 "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29)가마니 짜기
신작수필 |
29. 가마니 짜기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가마니는 원래 일본 것이었다. 일본말로는 ‘가마스’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마니가 되었다. 우리말로는 ‘섬’이라고 불렀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많이 와 있던 일본 사람들은 자국보다 싼 우리나라 쌀을 가지고 장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벼를 가공하여 쌀로 유통했는데, 우리나라 섬에 담아 보낸 쌀이 다 새 버리자 자기네 나라에서 가마니를 들여와 이용하였다. 그러다 보니 가마니 수입가에 부담을 느껴 우리 농민에게 ‘가마니 치기’를 가르치게 되었다.
가마니는 당시 시골에 살면서 상당한 부수입을 올린다. 그것도 시골에서 나는 재료가 가장 많은 볏짚으로 만드는 것이다. 제일 손쉬운 부업이 농사를 많이 짓기 때문에 짚의 생산이 가장 많아진다. 물론 이 짚은 최우량은 소먹이로 보관하고 그리고 차 우량은 가마니 짜거나 새끼를 꼬고, 보통 짚은 집에 지붕을 이는 이엉을 엮는다. 그리고 농사가 잘 되지 못한 짧은 짚은 부엌에 불쏘시개로 사용된다. 물론 외양간에 소를 위해 바닥에 짚으로 사용되어 거름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보면 당시 농사짓는 집에서는 짚의 활용도가 참 많았다. 요즘 세상에는 기계가 좋아서 농사가 끝나고 짚이 비싼 값으로 팔리는데 이 팔린 짚을 기계를 이용해 비닐로 돌돌 말아서 큰 뭉치가 되어 논둑에 적치되어 있다가 화물차로 모두 싣고 가버려서, 짚을 사용하려면 예약을 하지 않으면 농촌이라도 사용하거나 구경조차 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좋은 짚은 가마니 치려고 머슴들이 낮일이 끝나고 모두들 모여서 짚 추리기 대회를 한다. 짚을 작은 볏단으로 탈곡한 몇 단을 풀어 큰 단으로 묶어서 짚의 밑동을 작두로 썬 후에 나무 방망이로 짚 밑동을 두들겨 패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마니 짜기를 할 때 부드러워야 잘 먹이고, 잘 받아서 내려치기를 할 때 고루 눌러져서 가마니 짜기가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우선 가마니를 짜려면 가마니틀, 바디, 날줄로 쓸 가는 새끼, 짚 먹이는 끝이 바늘처럼 된 대(竹)작대기, 도리 등이 있어야 한다. 다 짜고 나서는 가마니틀을 해체하는 나무망치, 깁는 대바늘 등도 필요하다.
굵고 두툼한 나무로 직사각형의 틀을 짜고 양편에 두 개의 기둥을 비스듬히 박아, 그 기둥 끝에 도리를 끼운다. 이 도리와 밑바탕 받침에 날 38개를 둘러 감아 작대기로 짚을 먹여 바디로 다져가며 가마니를 짰다. 가마니틀은 구조에 따라 인력 2인용, 인력족답용(人力足踏用), 인력 겸 동력용 회전형, 동력자동형 등으로 분류된다.
우리 집에 있는 가마니틀은 인력 2인용으로 볏짚을 공급하는 사람과 공급된 볏짚을 바디로 탄탄하게 다지는 사람이 합동해 짜는 기계이었다. 밤새도록 쿵쿵 내리치니 짠 가마니가 그득하다.
그러자 이제 셋째 형님께서 대바늘을 가지고 가마니를 매서 완성하여 그 속에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간밤에 쳐서 만든 가마니 수가 열한 장이나 되었다.
이렇게 가마니 짜기는 농촌에서 당시에는 많은 수입이 되었다. 곡식을 내거나 할 때 담을 수 있고, 아울러 이 가마니를 많이 쳐 두고 있으면 가마니 사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 가마니는 농촌의 휴한기(休閑期)에도 수입을 올리는 짚공예의 결실이 되었다.
우리 집 겨울 휴한기에 없어서는 안 될 놀이이었고, 동시에 서로 많이 치기의 경쟁력과 추운 겨울에도 식구들이 함께하는 운동이요, 수입의 원천이 되었다. 가마니는 일본에서 왔지만 우리나라에 정착하면서 우리나라 겨울에는 없어서는 안 될 경제 확보의 수단도 되었다.
가마니는 가만히 두면 안 되고, 담거나 팔거나 자주 이용하여야 제 값을 할 수 있다. 가마니는 당시에 꼭 필요한 큰 담을 그릇이기도 하였다.
( 푸른 숲/20100-2012.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