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1집 "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21)불국사의 종소리

청림수필작가 2012. 10. 22. 11:41

신작수필

21. 불국사의 종소리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다시 말해서 나의 어린 날의 삶의 궤적은 새삼스럽다. 누구는 경주 불국사를 평생에 한 번 와볼까 말까한 곳을 어린 시절을 두고두고 살아 왔던 곳이라면 행복이라고 할까, 불행이라고 할까. 흔히 요즘도

“고향이 어디십니까?”

라고 묻는 대답을 하여야 한다.

“경주 불국사기차역 앞인 데에.”

하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다.

“아이고, 좋은 데가 고향이십니다.”

그러면 나는 언연 중에 정말 나의 고향이 좋은 곳인가 보다고 생각하게 된다.

초등학교를 다니기 전에 서당이라는 곳을 다녔다. 그것도 공식적인 서당이 아닌 동네에 글 잘 하시는 훈장님이 계셨는데, 그야말로 당시에도 선비라 할만 하셨다. 사시사철 흰 버선을 신고 백고무신에 한복에 흰 수염을 기르시고, 정자관을 쓰고 평소에 장죽을 물고 논둑으로 만 왔다 갔다 하면서 지어 놓은 농사를 훑어보시는 것이다. 그리고 논매기 철이 되면 절대로 논은 매지 않으시는데, 사위를 시켜 논을 매게 하시고는 짝가래를 어깨에 겯고서 하릴없이 논둑만 맴도시는 것이다.

내가 서당이랍시고 가면 논둑에서 한문책을 펴게 하시고는 어제 배운 것을 암송하게 하고, 이를 확인한 후에서야 오늘 배울 것을 시작하셨다.

벼가 제법 자라 올라오면 초벌매기 논매기가 시작되고, 그러면 무논에서 개구리가 개굴개굴 울고, 비 기운이라도 있으면 청개구리들이 갹갹∼ 갹갹∼ 거리고 운다. 내가 한자(漢字)를 한 자(字)씩 배우고 있으면 어느 새 개구리도, 청개구리도 그날 한문(漢文)을 깨치고 개굴개굴, 갹갹∼ 갹갹∼ 후렴을 따라 부른다. 그러면 먼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짙어지면서 낮의 후끈한 열기가 논벼 고랑사이로 지나면서 짙은 녹색의 볏 대가 저절로 내가 배운 한문 실력만치 쑥쑥 자라 오른다.

내 고향 경주분지(慶州盆地) 윗시래 벌판은 곡창은 못 되도 집집마다 양식은 할 수 있는 쌀 생산지이다. 그래도 분지의 가장자리에 있으면서도 분지 흉내를 낸다.

서당 훈장님의 논은 일곱 마지기로 세 두락이며, 그 논의 모양새가 정사각형이다. 이 논에 대한 사연이 있다. 훈장님이 불국사에서는 글줄을 했기에 천석군집에서 맏딸을 훈장님에게 시집보내면서 주신 논이라고 하며, 아울러 앞산(아마도 1정보 정도인가?)을 물려받고, 훈장이 자급자족 하도록 한옥(韓屋) 한 채까지 받으셨다고 한다. 당시 시골로서는 후한 처가에 속하는 것쯤으로 기억하고 싶다.

당시 내가 서당에 갈 때에는 벌써 훈장님은 연세가 드셨다. 땔감을 하러 훈장님 사유지인 앞산 꼭대기에 올라 가셔서 풋나무 등을 해서 산골짜기 꼭대기에서 묶은 나무를 발로 차 버리면, 산기슭 맨 아래로 굴러 떨어져 도착한다. 산꼭대기에서 백수 노인께서 도술을 부리는 것처럼 얼마나 재미있는 광경이었던가. 그것을 훈장님께서 지게에 지고 오셔서 땔감을 충당하시곤 하셨다.

아드님이 한 분 계셨다는데, 육이오 때에 아마도 납북 되셨지 싶다. 그리고 딸이 한 분 계셨다. 그래서 그런지, 딸에게 땔감을 해 오라고는 못하시니까 직접 그렇게 나무를 하셨나 보다. 사위는 있어도 곧잘 회사에 출근을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서당을 가게 된 까닭은 백형과 내가 스물네 살 차이로 우리 아버지께서 철학이 있어서 나에게 한문 공부를 하게 하신 것이었다. 하도 궁금해서‘아부지, 왜 제가 서당에 가서 어려운 한문 공부를 해야 합니까?’그러자 우리 아버지 왈,

“야야! 봐라, 네 백형과 나이 차이가 이십 사년이잖아, 그러면 제사 지내려면 축문(祝文)도 써야 하고, 시집·장가보내려면 사성(四姓)도 써야하는데 그걸 네 백형이 하던 것을 받아서 직접 해야지.”

우리 아버지 삶의 철학이 대단하십니다. 벌써 그때부터 후대를 생각하는 라이프 서클을 단단히 아신 것 같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안 보내 주어서 또 서당에 나갔다.

한석봉 천자책을‘지킬 수(守)자’까지만 배우다(약1/4로 250자) 다 떼지도 못하고 초등학교에 가서 졸업했다. 그리고 초교 졸업 후 2년간 배운 한문책이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편(啓蒙篇), 명심보감(明心寶鑑), 통감(通鑑) 등이다. 한 권이 끝나면 아버지께서는 오일장날 가판(街販)에 파는 책을 잘도 구해 오셨다. 그러하신 아버지 덕택(?)에 후에 국문학을 하면서 한문에 상당히 덕(?)을 본 것은 차후에 고마웠지만 그 때는 한문공부가 그렇게 하기 싫어서 근성근성 시간만 때운 적이 많았다. 새보(新洑) 둑에 밤알이 듬성듬성 보이는 가을철이면 훈장님은 익어 가는 논벼를 친구삼아 나를 논둑 가장자리 죽 늘어선 나무그늘에 앉히고 또 한문공부를 시작하곤 했다. 완전히 노천학교에서 자연을 벗 삼아 배우는 자연의 학교이었다.

한문 공부를 하러 갈 때는 반드시 지게를 지고 가도록 하였는데, 어쩌면 우리 아버지는 참 고마우시기도(?) 하셨다. 지게에다 한문책과 붓과 먹, 벼루를 보자기에 돌돌 말아 얹어 공부한 후에는 바로 풀을 베서 지게에 지고 오라는 것이다. 이러한 풀베기를 하루에 너 댓 번을 하여야 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소가 많아서 풀은 베 오는 대로 모두 소먹이가 되고, 그나마 남으면 짚과 함께 작두에 썰어서 쇠죽 끓이는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의 유년기에 체험을 찾아서 고향엘 오랜만에 갔는데, 웬걸 이제는 모두가 변해 버렸다. 오로지 팔순 되신 우리 둘째 형수님만이 반겨 주시고, 훈장님 댁은 흔적도 없어졌다. 훈장님 댁은 본래 시너대가 울타리로 되어 있었는데, 훈장님이 돌아가시고서는 대나무에 꽃이 피어서 집이 몰락해 버렸다고 형수님이 곱씹어 알려 주신다.

내가 고향을 찾아간 저녁녘은 어둠살이가 시작하는 시간이라서 토함산 중허리 불국사에서 저녁 예불을 맞추려는 듯 ‘불국사의 종소리’가 나그네의 발걸음을 따라오며 은은히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여 들인다.

어릴 때 그 ‘불국사의 종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는데,

“디이잉~ 콰르르~릉! 디이잉~ 콰르르~릉!”

우는 불국사의 종소리이다.

나의 어릴 때 익히 듣던 그 불국사의 종소리이다. 마치 환청처럼 종소리가 연이어 울리어 오면 알지도 못할 한 줄기 바람에 묻힌다.

온통 불국사 지역에 불국토(佛國土)의 기원이 가득하다. 옛 훈장님은 간 곳이 없고, ‘불국사의 종소리’는 옛날과 다름없는데 내 고향 경주시 윗시래에 발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산그늘이 다가와서 어둠이 엄습한다.

( 푸른 숲/20100-2012.10.22.)

출처 : 푸른 숲/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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