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1집 "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11)개남산(介南山)
신작수필 |
11. 개남산(介南山)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개남산(介南山, 80m)은 남산(南山)이 본래 이름이다. 남산은 흔히 남쪽에 위치해 있다고 남산이다. 본래 경주 남산도 남산이 아니다. 금오산(金鰲山, 468m)이다. 서울에 남산도 남산이 아니다. 목멱산(木覓山)이다. 이렇게 본 이름이 있는데도 아직까지도 일본 식민지사관 잔재가 남아서 남산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심지어 구(區)이름도 동·서·남·북·중구 등이라 부르고 있다. 모두가 일본 잔재인데도 말이다. 사실 개남산은 남산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말에 앞에 “개(介)”자가 붙으면 좋지 않다.
경주시 시래동 아랫시래 마을 뒤편에 높이 80m의 산이 있어 신라(新羅)가 도읍을 정할 때 이 산을 남산(南山)으로 정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산의 형상이 기러기가 날아가는 형국이라 산 동편에다 못(朝陽池)을 막고, 서편바위에는 정으로 구멍을 내어 쪼진바위(혹은 쪼진뱅이)라 하여 산세를 돋우었다고 한다. 그래 놓고 보아도 부족하고, 산세가 약하여 지금의 남산으로 정하고 이곳은 도읍이 못되어 개남산(介南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개남산을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동서남북이 생길 것이다. 동쪽에는 조양 못이 있고, 남쪽에는 시래동 아래시래 마을이 있으며, 서쪽에는 쪼진 바위가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조양동에 자연마을인 대추밭이라고 있다.
동쪽에는 조양 못이 위치하여 한해(旱害) 때 논에 관개하기 좋게 물을 채워 두었으며, 간혹 강태공들이 모여들어 낚시를 드리우기 좋다. 물론 내가 어렸을 때는 조양 못 북편 둑에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였는데 청춘남여 데이트 코스가 발달되었던 곳이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벚꽃나무가 다 사라지고 거의 없어져 버렸다.
남쪽에는 요즘 아랫시래 마을에는 어쩜 그리 절이 많이 들어서는지 이상스러운 마을로 변질되고 있지 않은가 걱정이다. 내가 어렸을 때도 절 하나는 본래 있었다. 마을에서는 배·최·박씨들이 주로 많이 살았는데 이제는 들어온 성씨가 많다고 한다. 배산임수가 되고 바로 마을 앞에 내가 주장 하였던 스트레이트 도로도 났고, 이제 아스팔트가 되어서 삶의 편의성을 도모하여 두었다. 시간마다 경주 시내버스도 다닌다. 마석산에서 올라 내려다보면 살기 좋은 마을로 보이고 있다.
서쪽에는 보칠보(寶七洑)가 있어 옛날에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소를 기르면서 집단으로 우사(牛舍)가 들어섰고, 아울러 논바닥에 경주 우시장(牛市場)이 정기적으로 서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이익이 생기겠지만, 환경적으로는 많은 시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북쪽으로는 대추밭이 있고, 특히 개남산 산기슭으로 보면 암자가 많다. 이 암자 중에 나의 둘째 누이 제(祭)를 모신 곳도 있어서 남달리 그 앞으로 지나기가 민망하다. 애닯다. 연세 쉰다섯에 제대로 살지도 못하시다 돌아 가셨기에 더욱 애닯고, 애닯다. 우리 십남매 중에 이제 꼭 반이 남았다. 백형, 중형, 숙형, 둘째 누이, 다섯째 누이 등 모두 다섯 분이 저 세상으로 가셨다. 물론 이 세상을 살면서 일찍 갈 수도 있고, 적당히 살고 가시는 분도 있겠다. 그러나 길게 사시는 분은 우리 집안에 아무도 없었다. 할아버지 쉰아홉, 아버지 일흔 여섯, 어머니 일흔 셋, 백형 일흔하나, 중형 일흔아홉, 숙형 예순다섯, 둘째누이 쉰다섯, 다섯째누이 세 살 등이다. 막내 누이를 빼고 보면 평균 69.8세로 장수집안은 아니었다.
신라시대에 만약에 이곳에 도읍이 정하여졌더라면 하는 언연 중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랬으면 분명 이변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협소구역이라서 궁궐과 각종 행정관서가 들어서기에는 분명 좁았을 것이 뻔하였다. 천년 신라의 수도가 그리 협소하여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 정하지 않은 현명한 혜안이 있었기에 신라가 천년을 가게 된 것은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개남산은 남산이 못 되어서 개 남산이다. 개남산은 그저 경주분지 중에 가장자리에 낮은 구릉역할을 할 뿐이고, 자연 속에서 그냥 존재할 뿐이다.
근세조선시대에 “조역(朝驛)”이라 하여 역참(驛站)이 있어 관원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말을 먹이고, 마패에 나타난 말의 수에 따라 말을 동원하여 주던 편리한 곳이었다. 요즘은 교통이 편리한 것이 좋지만, 과거에는 역참에 역졸들이 상반(常班)에 속하기 때문에 그 마을이 좀 그랬다.
지금에 와서 보니 조양 못이 있어 경관을 빛내어 줄 뿐만 아니라 내가 교육대학 다니던 때 그래도 아랫동네 어른을 모시고 갈매 밭을 구입하여 경주여자정보고등학교를 유치한 것이 이 개남산을 살려 주고 있지 아니한가? 그렇지 안했더라면 지금도 비포장에 아무것도 없는 그런 자연부락에 서 있는 개-남산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 푸른 숲/20100-2012.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