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1집 "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9)새보(新洑)

청림수필작가 2012. 10. 9. 22:17

신작수필

9. 새보〔新洑〕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새보(新洑)는 우리가 살던, 아니 내가 네 번째 이사하여 살던 곳이다. 우리 고향에 보가 일곱 개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늦게 만들었다고 새보라 고 한다. 새보는 말만 들어도 보중에 제일 최근에 만든 것이라는 말이다. 아울러 송계(松谿) 어르신이 새 터를 잡은 그런 곳이다. 우리 집이 열두 동(棟)이고 종형 집, 이웃집 한 집이 있었다. 모두 열네 동이 작은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그것이 1956년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해에 아버지께서 손수 지으신 집들로 작은 마을로 이루어 살게 되었다.

 우리 집은 네 동이었다. 큰 채, 사랑 채, 방앗간, 헛간 등이었고, 나머지 여덟 동은 모두 한 동씩 세를 내어 주었다. 우리 아버지의 수완으로 목수를 하시면서 농사를 짓는 반농 반목수 이었다. 집도 당대에 밭(4,000평)을 사 두어서 밭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어 두었다. 그 나무가 기둥이 될 즈음 부지에 집을 집단적으로 손수 지으셨다. 앞집 종백씨(從伯氏) 집까지 지어 주셨다.

 새보 머리는 세 번째 살던 집 앞 마을 입구에 있다. 우리 집은 말이 새보이지 중허리에 위치해 있다. 그래도 흔히 명칭이 새보라고 한다. 그리고 새보 머리에서 물이 잘도 흘러 나와 이 물이 조양 못으로 흘러들어 간다. 조감(鳥瞰)하여 보면 북쪽에 기장댁 집이 언덕아래 두 동이 기역자로 있고, 둘레에는 밭으로 뽕나무가 경계를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집이 서편에서부터 여덟 동이 차례로 들쑥날쑥하게 집을 잘 배치하여, 서로 간에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어긋나게 지어 놓았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집은 네 동으로 북쪽에 큰 채가 서편에 사랑채가 동편에 방앗간(디딜방아 설치)이, 사립문 쪽으로 앞에 헛간을 연속으로 지어 두어서 허드레 물건을 넣고 건초, 거름(재, 소 거름, 기타 등등)을 모으는 역할을 하는 곳이 되었다.

 흔히 윗동네, 아래동네에서 우리 집을 통칭으로 “새보 집”으로 통한다. 물론 우리 집만 지칭할 때는 택호는 “송계댁”이요, 별칭으로는 “해당화 집”이라고 한다. 집을 열네 동이나 짓고도 버드나무가 남아서 4,000평 밭 둘레에 간간히 듬성듬성 버드나무가 서 있다. 그 버드나무에 광석라디오 안테나를 달아 놓고 당시 최고의 문화이기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우리 집도 역시 작은 아버지 밭 경계에 뽕나무가 있고, 우리 밭 중간마다 고르게 감나무 열세 그루가 심어져 있다. 간간히 가죽나무, 고욤나무 세 그루가 양념조로 심어져 있다.

 새보는 새 부자가 나는 터라고 했다. 그런데 부자는 못 되었고, 그냥 밥만 먹고 살 정도이었다. 당시 시골로 논이 일흔 마지기 정도 이었다. 그러면 백석지기이었다. 큰 머슴, 중간 머슴, 작은 머슴이 있었고, 소가 열한 마리나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면서 이 소꼴 때문에 낮에 소 풀베기를 하였다. 물론 머슴들은 먼 산, 중간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와야 했다. 밤이 되면 머슴들이 힘들여 가면서 여물 썰기를 하였다. 그것이 끝나자 말자, 짚공예로 제일 많이 하는 것이 새끼 꼬기이었다. 그것도 가마니 치기용으로는 가는 새끼이고, 지붕 이우기용은 굵은 새끼를 꼬아야 한다.

 우리 집은 들판 가운데에 있었고, 바로 기차역 앞에는 소도시이고, 우리 집이 있는 곳은 전형적인 농촌이었으므로 관광지 불국사를 무전여행으로 찾아 왔다가 돈이 떨어지면 농촌으로 찾아 든다.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절대로 그냥 밥을 주지 아니 하였다. 사전에 약속하여서 밥을 준다. 2∼3일간 일하고 밥을 먹고 가라는 것이었다. 여름 무전여행을 온 대학생들과 나는 친했다. 저절로 그 분들의 발전된 도시생활하며, 그들의 삶을 엿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집에서는 하루 이십 여명이 식사를 하는 곳이라 매일 잔치하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밥상이 모두 개별 밥상을 차려 주는 것이었다. 마치 잔치를 하면 도판을 차려 밥상을 죽 정리하여 두고 수저를 놓고, 기본 반찬을 차례로 접시에 똑같은 순서로 놓고, 국, 밥을 퍼 담으면 일시에 상이 차려 지고 머슴들이 사랑채, 토방, 큰방, 머릿방으로 차례로 나르기 시작하여 식사가 시작된다.

 저녁에는 밥을 일찍 먹고 큰 채 문 위에다 남포 불을 밝혀, 불 하나로 모두가 단체생활을 하게한다. 개별 방에 불을 밝히지 못한다. 특히나 비가 오는 날에는 불을 켜지 못하므로 일찍 자게 한다. 새벽 네 시면 모두가 일어나야 한다. 군대라도 보통군대가 아니었다. 우리 집에 오신 손님까지도 똑같은 생활을 하여야 하였다. 누가 산 위에서 내려 본다면 그 집은 참 희한도하다 할 것이다. 밤에 불을 적게 밝히는 반면에 새벽만 되면 불을 밝히고 아침운동으로 윗마을에 가서 개똥을 모아 오도록 한다. 우리 집 남자들은 이 과정을 매일 생활화 되어 있어서 전자동이다. 만약에 이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먹을 것을 거부당한다. 조심하여야 했다. 정말 새보 사람들은 무서웠다.

 그래도 숙달이 되고나면 몸이 참 개운하여진다. 저녁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건강 유지에도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기 몸에 음식이 맞지 않아서 배탈이 나면 병원도 안 가고 우리 아버지 만병통치약 7알을 받아서 먹고, 물마시면 배 아픈 것이 저절로 나아 버린다. 새보에서만 처방하는 특효약이었는가 보다.

 그리고 여덟 집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돈을 받지 아니하였다. 무료는 아니고 단지 한 달 살고 하루 농사일을 하여야 한다. 8집×12일=96일분 일꾼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현금을 내지 않고 일하면 점심, 새참 먹고, 담배 주니 오히려 일을 더 하려고 하였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머리를 비상하게 잘도 사용하셨다.

 이렇게 “새보”에서는 열심히 일만 하는 집이 있었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먹고 일하고 공동으로 살 수가 있었다.

( 푸른 숲/20100-2012.10. 9.)

출처 : 푸른 숲/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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