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청림수필집·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

[스크랩] 푸른 숲/20100 수필1집 "내 고향이 그리운 것은"-(3)우물

청림수필작가 2012. 10. 7. 12:13

신작수필

3. 우물

이영백

cheonglim03@hanmail.net

 

 사람은 물을 먹어야 산다. 요즘은 도시가 되면서 상수도가 설치되고 수도 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지만 시골에 살다 보면 그 당시로는 우물(井)이 아주 중요하였다.

 내가 태어난 동네에 유명한 우물이 하나 있었다. 홰나무 우물이다. 내가 태어나서 그 마을에 살기 전부터 우물은 있었다. 바로 동사(洞事)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고, 아울러 물포구(왕보리수)나무가 마을의 당수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섣달 그믐날 밤, 잠을 자면 눈썹이 샌다고 하여 밤새 잠을 못 자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면 우리 어머니께서 장난으로 쌀가루를 발라서 눈썹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 밤이 지나 새해, 새날 정월 초하루 첫 시간인 새벽 네 시에 밤새 우물 속에 촛불을 켜 두었다가 정안수로 떠 오는 수고를 결코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 모두가 지극정성으로 부모가 자식 잘 되라고 빌어 주는 고마운 정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 조금자라 서쪽 집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이제 우물이 멀어져서 약국집 앞에 우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물은 날이 가물거나 하면 잘 말라 버려서 장기적으로 두고두고 사용할 물이 부족하였다.

 우리 넷째 형님이 나보다 다섯 살 위인데 참 번지러웠다. 어느 늦가을 날 형님이 이 우물가에 시멘트로 흄관을 만들어 얹어 둔 곳에 걸터앉아 놀았다. 몰아치는 강한 바람과 앉은 자리가 너무 깊게 앉아서 그만 형님이 우물 속으로 퐁당 빠져 버렸다. 우물 속에서 살려 달라고 고함을 쳐도 아무도 없었다.

 마침 지나가던 우리 동네 참봉이 들었다. 우물이 그렇게 깊지는 않았나 보다. 참봉은 논에 들릴 때면 짝가래를 항상 가지고 다니셨다. 이 짝가래의 가랫날은 나무로 만들어서 사용은 형식적이고 그저 폼으로 가래가 달려 있고, 아울러 멀리서 물고를 집적거리는 데 활용하기 좋게 만든 자루가 긴 가래이다. 바로 이 짝가래를 우물 속에 집어넣어서 타고 올라오게 하여 우리 형님을 살려 주신 바로 그 우물이었다.

 이제 세 번째 이사를 하였다. 우리 집 바로 서쪽 대문간에 우물이 있었다. 물도 깊고 물맛이 아주 좋았다. 우물이 좋아야 사람들이 건강하고 물을 잘 이용할 수 있어 좋은 것이었다. 여기 우물가는 동네 이야기를 전하는 전달 장소이었다. 우물하면 시정(市井)이다. 우물가에서 동네 이야기를 듣고 옮기고 따지고 결정하는 좋은 장소이기도 하였다. 심지어 빨래도 하고, 그 물이 흘러 내려 항상 물이 고인 자리는 미나리꽝이 되고 만다.

이제 초등학교 입학 전 네 번째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이곳은 우리 집 밭 사천여 평만 있고, 우물이 아예 없었다. 사람이 살려면 물이 우선이었다. 여기서 도랑물을 먹고 살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밭 북쪽에 집터를 잡았고, 밭 가운데로 길을 내었다. 우리 집 밭 서쪽 둘레로 조양 못으로 물이 흐르는 도랑이 있었다. 아버지의 측량으로 우물은 도랑물이 흐르는 곁에 우물을 파면된다고 하셨다. 당시 우리 집에는 머슴이 셋 있었다. 큰 머슴, 중머슴, 작은 머슴이라고 지칭하였다.

 먼저 숙형(叔兄)과 계형(季兄)이 터를 잡고, 중머슴이 힘을 발휘하여 흙을 파내기 시작하였다. 이 때 사전에 우물을 만들 때 사용하려고 여러 가지 형태의 돌을 큰 머슴이 구해다 놓았다. 흙을 제법 파 올라오기 시작하니 돌을 가지고 담을 치듯이 자꾸 쌓아 내려갔다. 이제 제법 사람 키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니 우물 판 위에다가 삼발이 나무를 세우고 도르래를 달아 흙을 파내어 나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흙 파낸 자리에 돌을 들여서 쌓아 내려간다. 그리고 그 작업을 계속하였다. 사람 키 한길 반으로부터는 물이 새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때 아버지께서 나를 불렀다. 나는 그저 우물은 어른들이나 파는 것으로 생각하고만 있었다. 아니 우물을 파는 데 왜 나를 부르실까 한편 걱정이 앞섰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우물 파는 속으로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몸피가 작아야 밑에 흙을 파내기가 쉽지. 제일 작은 막내가 내려가라!”

고 명령을 하시는 것이었다.

 꼼짝없이 나는 우물 파는 데 동원이 되고 말았다. 깊이 판 우물 속에서 호미로 흙덩이를 파서 내려온 양동이에 흙탕물을 퍼담아 줄을 당기면 위에서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달려 올라가는 양동이에서 흙탕물이 떨어져 내 얼굴에 그대로 머드팩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 하늘을 쳐다보니 조그만 동전구멍 속처럼 하늘이 내려와 있다. 아무도 없는 세상, 나 혼자만이 이 깊은 우물 속에 있다. 만약에 이 우물이 부실하여 무너진다면 나는 살 길이 없다. 빨리 이 흙탕물을 퍼 담아 주고서 저 지상으로 올라가서 숨 한 번 크게 쉬고, 그저 살고만 싶었다.

 그것도 어릴 때 아무도 없는 우물 속에서 빠끔히 보이는 동전하늘을 쳐다보며 빈 양동이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무척 길고 마치 죽을 것만 같았다. 어느 샌가 파고 있는 우물에 조그만 개구리 두 마리기 들어 와있다. 아니 너희들은 이제 우물 안의 개구리다. 파고 있는 우물 안의 개구리는 이제 부터 슬픈 신세다. 꼭 그곳만 알고 살아야 한다.

 우물 속에 들어가서 작업을 한 번은 꼭 해보라. 조그만 동전 하늘은 어려서 그런지 몰라도 그렇게 나는 무서웠다. 꼭 한 번 우물을 파 보라. 그러면 세상사는 일을 다시 느낄 것이다. 죄 짓지 않고, 좋은 일만하고 떳떳이 살 것이라고 맹세도 할 것이다. 아! 정말 그 순간을 이기고 땅위로 올라오면서 그 우물은 나에게 무언가 교훈을 주고 있었다.

 이후에 아버지 새참에 잡수실 막걸리주전자가 줄에 묶이어 드리웠고, 물외를 따서 두레박에 넣어 차게 하였다가 냉채를 만들어 먹었던 기억도 난다.

 아버지는 우물이 있는 곳으로부터 우리 집 앞까지 어디서 해당화(海棠花)를 구해다가 심어 주셨다. 그래서 아랫마을에서는 우리 집을 부를 때 “해당화집”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 넷째 누이도 “해당화집 처녀”이었다. 당시 우물은 꼭 필요한 존재이었다.

( 푸른 숲/20100-2012.9.26.)

출처 : 푸른 숲/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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