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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필 5/또천달 형산강

(엽서수필 5) 또천달 형산강 91. 달빛 모으다

 

엽서수필 5 : 년의 빛 흐르는 형산강

91. 달빛 모으다

이영백

 

 달빛 모으다. 여기저기 달빛 모으는 것이 아니라, 신라의 달빛을 모은다. 달빛이 모이면 반창회를 한다. 신라 달빛도 일천 년을 그때그때 환란 겪으며 지내왔으리라. 달빛이 삶의 고통을 대신한다. 직접 조명이 못 되는 여린 달빛은 늘 누구에게나 은은하게 위로하여 준다. 달빛 모은다.

 머릿방 높이 달린 동창으로 작은 구멍이 생기더니 공부하는 내 책상머리에 길게 내리 비추인다. 작은 빛이 책상위에 닿으면 커다란 여린 빛의 원을 만든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다. 여기저기에 둥근 원이 생겼다. 나는 그들 달빛을 하나씩 반겨 맞이한다. 신라의 달빛이다. 경주의 달빛이다.

 아버지달빛은 아버지 역할을 한다. 많은 자식들 건사하고 인간되라고 매일 그때그때 일러준다. 걸음걸이, 어른에게 말하기, 상대방에게 말하기, 필요할 때 굽힐 줄 알며, 자랑하고플 때 숨길 줄 알도록 가르쳐 주었다.

 어머니달빛은 어머니 사명을 다한다. 많이 낳은 자식들 거둬 먹이고, 길쌈하여 철따라 옷 갈아입히고, 때 묻은 옷 손빨래하여 다림질하여 준다. 화려한 천은 아니더라도 무명, 삼베, 성혼하면 명주까지 고루고루 입혀 주어 헐벗음을 숨겨 주었다. 어머니의 은혜는 뼈를 갈아도 다 못 갚는다.

 형님달빛은 형님다운 본보기를 준다. 많은 동생들에게 늘 모범을 보이고, 혹 없이 여김 당하지 않도록 울타리 쳐 준다. 혹 약하게 보일 새라, 늘 걱정하고 다독이며 밝음을 기본으로 자라게 도와준다.

 누님달빛은 누님다운 섬세함을 보여 준다. 많은 동생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동생 돌보기를 자기 몸 이상으로 돌본다. 누님들은 시집가면 집안 욕 안 먹도록 노력하고, 좋은 가문의 여식으로 자랐다는 소릴 듣는다. 하나같이 집을 찾아가도 살림살이 잘 간수 하고, 부지런히 검소하게 생활한다.

 신라달빛은 남천 시래천변에서 자라고, 모은 달빛을 하나같이 풀어내어 자기 삶에 보탬이 된다. 달빛, 신라달빛을 모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고 늘 모범으로 여린 빛이나마 자랑스러운 가문을 전해갈 수 있다.

 달빛은 오늘도 모은다. 신라의 달빛을 모은다. 어디에 가서 살던 신라의 달빛을 잊지 말라고 이국 캐나다에 가서 사는 손녀 이름에 “신라를 잊지 말라”고 “세라(世羅)”라 지었다. 직접 빛 비추이지 못하는 달빛이라도 모아 기도한다. 신라의 달빛이 소리 소문 없이 도와 줄 것이라고.

(20220830.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