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수필3 : 일흔셋 삶의 변명 “미늘” |
85. 다시 못 이야기
이영백
어렸을 때 못은 두려움이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찾아오지만 얼음 녹으면서 숨구멍으로 통하여 몰아 오르는 공기팽창이 밤이면 얼음 깨어지는 소리로 들린다. 상상도 못할 대 괴성으로 “꾸~르릉~ 꾸웅~ 우~~웅~”긴 여음으로 들리었다. 매끄럽던 얼음판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슬픈 소리는 짧은 봄밤 무서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얼음 깨지면서 봄이 기지개켠다.
1960년대 말 농촌은 문화시설이 없었다. 들판의 초가삼간을 지키는 엄마는 문화가 고팠다. 세 번째 좋은 우물이 있던 집 대문에 마주한 김해(金海)댁은 시동생이 일본 유학하여 많은 돈 벌어 고향에 땅 샀다. 일찍 개명한 집안이라 불국사기차역 앞에 여관 겸 가게도 마련하였다. 김해댁에 일본 텔레비전을 갖다 놓았기에 매일 엄마는 그 집에가 TV구경한다.
비 내린다. 한밤이 지났는데도 엄마가 오지 않았다. 늦은 시간 공부하고 있는데 사립문 철사 열쇠 흔드는 소리에 엄마인가 나가 보았다. 엄마가 기진맥진하여 비 맞고 왔다. 옷은 온통 흙탕물에 젖었고, 정신 줄을 놓았다.
“복아! 오늘 못에 도깨비들하고 싸움하다 왔다.”
“에이! 엄마는 도깨비를 와 만났는데? 김해댁에 TV보러 갔지?”
“그래. 집에 오는데 다리 없는 도깨비가 나를 못으로 데리고 가데….”
그리고 그 긴 이야기는 온통 조양 못 속으로 들어가서 물을 헤집고 도깨비와 사투를 벌였다는 것이다. 용케도 다리 없는 도깨비를 어찌하여 이기고(?) 막내아들 토방공부방 불빛보고 찾아왔다고 하였다. 비 그치고 조양 못으로 찾아갔다. 그곳에는 온통 빗물이 넘칠락~말락 물이 실려 있고, 붉은 핏자국을 묻힌 모지랑 방비 하나가 떠다니고 있다.
고향 못에도 봄이 왔다. 물안개 피어오르다 햇발이 두터워지면서 바람 한 점 없이 고요의 수면을 만든다. 순시하던 목선에 밀짚모자 눌러쓴 할아버지의 노 젖는 모습은 가히 한가롭고 정답다. 그리고 싶은 못의 풍경이다.
나에게 고향 못은 놀이터였고, 낚시터였다. 봄마다 아가씨들 벚꽃놀이 하고, 봄바람 잡는 곳이다. 간혹 붉은 고추잠자리 떼 지어 비행한다. 왕잠자리가 69로 교미하여 못의 푸른 하늘을 비행한다.
토함산은 그 물에 비치고, 폐철될 불국사기차역에 전동차가 출발한다.
(20210717. 토. 제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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