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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인)푸른 숲 수필가·20100/늚이의 노래 1

(엽서수필) 12. 송계댁


12. 송계댁

이영백


 엄마는 그렇게 부잣집 셋째 딸로 자라 꽃다운 열아홉에 일곱 살 차이나는 신랑에게 가마타고 시집왔다. 걸어서는 무척 먼 거리였으나 요즘에는 차타고 10분이면 되는 거리이었다. 시집 온 달포부터 택호를 받았다. 경북 경주군 구정리 소정 냇가에 소나무가 자란 곳이라서 솔 송(松)자에 시내 계(谿)자를 합자하여 “송계댁”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경상도 사람들이 복모음 부르기에 그리 인색하였는지 택호를 올바르게 불러 주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에 “생개땍”으로 들리었다. 서당에 다니면서 자구(字句)를 배운 후부터는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증조는 셋째 집 건너에서 고조의 양자로 들어왔다. 조부 대에는 독자였지만 아버지 대에 사남매를 두었다. 아버지는 아들 다섯, 딸 다섯을 얻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는 데도 어찌하여 그리 많은 자식을 잘 얻었을까.
 엄마 열아홉에 시집 와서 열여덟 해 지나 큰 아들 열여덟에 장가보내어 스무 살 큰며느리를 얻었다. 간당 서른일곱에 시어머니 되었다. 시어머니와 큰 며느리 17년차다. 그 후 차례대로 아들 ㆍ 딸 장가, 시집보내었다. 당신 돌아가시고 꼭 삼년 만에 엄마는 그렇게 쉽게 북망산으로 가셨다.
 앞선 시대에서는 시집와서 벙어리로 삼년, 또 귀머거리로 삼년 살아야 하였다. 엄마는 속 좁고 성질 괴팍한 신랑 만나 좀 채 정 붙일 곳이 없었다. 그러나 송계댁 무던하고 복 받아 많은 자식 얻고, 살림이 절로 불어나서 부농 되었다. 한때나마 머슴 셋 데리고 일흔 마지기 농사지으며 소 열한 마리를 먹이었다. 아버지 목수로 집 열두 채 지었다. 네 채에만 살고 여덟 채는 세 내었다. 밭 4천 평, 산 3정보를 가진 자칭 소농대부가 되었다. 그러나 큰아버지, 삼촌 등 자녀 많이 낳아 놓고 일찍 돌아가셨다. 둘째 며느리였던 엄마는 큰집 제사를 모두 모셔와 일 년 열두 번 모셨다. 당신 자녀와 큰집, 작은집의 조카, 질녀 모두 열둘을 치송하였다. 집안대소사는 모두 치러내었다.
 무명베, 명주는 물론 삼베까지 일일이 엄마 손으로 거쳐 짰다. 정월 대보름에 봄낳이부터 철따라 옷 지어 머슴들 함박웃음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들판 가운데 살았기에 길손, 과객, 무전여행 대학생, 지나는 배고픈 사람 등의 요기 챙겨주기도 바빴다. 농사철 들밥에서는 여럿사람 모두 먹여 보냈다. 송계댁 마침내 돌아가시니 부군과 쌍분하고 유택에 석비 세웠다.
(20200413)